
안녕, 친구. 잘 지냈나요. 이번주에 본 영화를 소개해줄게요.
허진호 감독 | 한석규, 심은하 주연 | 1998년 film 8월의 크리스마스 <8월의 크리스마스>는 1998년에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첫 데뷔작입니다.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는 '정원(한석규 분)'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담담하게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 날, 주차단속원 '다림(심은하 분)'을 만나게 되고 둘은 서서히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지금 사랑을 시작해도 괜찮은걸까요. 미처 철들지 못한 두 남자가 만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야기해봤습니다. - 오늘 이야기 할 사람들 - - 윤성용 : 뉴스레터 xyzorba 발행인. 진지한 대화를 좋아합니다. 삶에 대한 깊고 다양한 고민을 자주 합니다. 제너럴리스트를 꿈꿉니다. - 김의환 : 출판잡지 에디터에서 대학원생으로 복귀. 뉴스레터 서비스 ‘오글리의 심야편지’ 휴업중. 잡다하게 보고 듣고 읽는 미디어 중독자입니다. 이제는 쓸 차례.
우리는 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봤을까 김의환 : 이 코너를 처음 시작하면서, 명작이지만 정작 사람들이 많이 안 본 작품을 다루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제게 <8월의 크리스마스>는 딱 그런 영화였어요. 1998년 개봉 당시부터 지금까지 제목과 명성을 숱하게 들어왔지만 선뜻 챙겨보진 않았거든요. 지난주에 처음 보고는 너무 좋아서 어제 한 번 더 봤고, 이 영화 얘기를 꼭 나눠보고 싶어 졌어요. 성용 님은 이 영화에 얽힌 사연이 있나요? 윤성용 : <8월의 크리스마스>는 중학생 때부터 꾸준히 봐왔던 영화예요. 저는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해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보다 절제되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영화를요. 문학으로 비유하면 시에 가까운 영화라고 생각해요. 김의환 : 영화 배경이 98년보다 앞이겠죠? 자동차가 티코니까 80년대까진 아닌 것 같고, 저는 90년대 중후 반일 거라고 추측했거든요. 더 옛날이려나. 윤성용 : 아마도요. 그 시절만이 가진 감성이 있잖아요. 주차단속원이나 사진관, 필름 카메라 같은 것들. 김의환 : 톤이 밝은 편이에요. 햇살이 잘 들고, 스쿠터 타고 바람 가르는 모습도 그렇고. 그러면서도 정적이고. 여름 느낌. 윤성용 : 지금 이 시기에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움츠러든 상황인데요. 김의환 : 사람도 자연도 가까이 대면하기 힘든 현실이라서, 계절과 사람을 감각할 수 있는 영화를 함께 보고 싶었어요. 여름의 매미 울음소리, 흐르는 땀을 닦으며 먹는 아이스크림, 시원한 바람과 장마, 계절을 지나면서 둘의 사랑도 짙어지잖아요. 우리도 겨울이 지나 봄이 왔는데요. 사회가 경직되어 있는 상태지만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사람의 마음이 바뀌고 마무리되는 흐름을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해요.
무채색의 일상에 나타난 색채 김의환 :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도 인상 깊었어요. 정원(한석규 분)이 장례식에 다녀와 기진맥진한 채 땀 흘리며 앉아 있고, 다림(심은하 분)이 사진관에 들어오면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나죠. 이런 잔잔한 연출이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윤성용 : 저도 그 장면 좋아해요. 나무 아래서 정원이 아이스크림 내밀면서 “아까 저 때문에 많이 화나셨죠. 미안해요.” 말하며 웃는 것. 김의환 : “너무 더워서 그랬어요” 윤성용 :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 눈 마주치면 정원은 씩 웃고, 다림도 따라 웃게 되고요.김의환 : 다림의 적극적이고 구김살 없고 당당한 태도가 좋았어요. 주차단속하면서 잡으러 다니고, 절대 아저씨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이 먼저 데이트하자고 하고. “근데 아저씨, 오늘은 왜 반말해요?” “아저씨. 아저씨는 왜 나만 보면 웃어요?” 같은 대사들도 매력적이에요. 윤성용 : 정원의 담담한 일상에 다림이 나타나 색깔을 입히는 느낌이죠. 김의환 :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잘 어울리더라고요. 윤성용 : 이 둘이 과연 사랑한 게 맞는가 싶을 정도로, 스킨십 장면이나 사랑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없어요. 그런데도 사랑이 느껴지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우산을 함께 쓰는 장면을 좋아해요. 다림이 우산을 씌워주려고 하는데 정원이 우산을 붙잡고, 그렇게 자신의 어깨를 빗물에 적시는 것에서 사랑이 충분히 느껴지죠.
90년대 한국 멜로 영화 김의환 : 혹시 멜로 영화를 좋아하세요? 윤성용 : 요즘엔 챙겨 보진 않아요. 멜로 영화 좋아하시나요? 김의환 : 그렇게 좋아하진 않고 챙겨 보는 편도 아닌데요.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영화는 좋아해요. 다 설명하지 않고, 다 보여주지 않고, 극단으로 치닫지 않아서요. 제가 싫어하는 멜로 영화는 너무 잘난 사람들이 나와서 우주의 사랑을 자기네들이 다 하는 것 같은, ‘세상이 무너져도 좋으니 우리 사랑만은 영원히’라는 식의 영화예요. 윤성용 : 저도 그런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김의환 :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있어요. 연애를 하면 사람이 유치해지고 바닥도 보이고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라는 생각도 들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괜찮은 사람이네.’라는 생각도 들잖아요. 멜로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랑을 그르친다든지, 미성숙한 모습을 보이면 속으로 뜨끔뜨끔해요. 그래서 영화 속에서 평범한 연인들이 사소한 이유로 싸우고 멀어지는 걸 보면서 공감되고… 그런 게 좋더라구요.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게 없었어요. 윤성용 : 정원과 다림의 관계가 그 정도로 깊어지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요. 김의환 : 그 정도까지 끈적하게 그리지 않아서 더 좋은 걸 수도 있고요. 윤성용 : 만약 둘이 가까워지고 정식으로 사귀게 되었다면, 서로 싸우기도 하고 엉망인 모습도 보였겠죠? 김의환 : 정원은 “나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단 말이야!”라면서 절규하고 다림은 기다리겠다면서 울고요. 만약 이런 식이었다면 신파가 되는 거잖아요. 시한부 인생이라는 설정 자체가 사람을 절박하게 만들어서 눈물 파티로 빠지기 쉬운데요. 이 영화는 거기까지 가지 않아서 좋았어요.
죽음에 대한 담담한 시선 김의환 : 영화 도입부의 내레이션부터 와 닿았어요.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머무는 게 좋았다고, 우리도 언젠가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고 정원이 말하는데요. 활기와 적막함이 교차하는 듯한 유년의 그 풍경이 제 안에도 있어요. 윤성용 : 영화 전반적으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담담하고 절제된 느낌이죠. 김의환 : 시한부인 정원의 심리적 동요를 세세하게 보여주는 영화잖아요. 내면의 절박함과 괴로움 같은 것을 터뜨리거나 장황히 설명하지 않아요. 그에게 천천히 드리우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연출이 인상적이었어요. 병원 다녀온 후 정원이 발톱을 깎다가 드러누워서 조용히 눈물 흘리는 모습도,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를 마치고 뒤집어 둔 그릇들도 그랬어요. 윤성용 : 맞아요. 아버지와 시장에 가서 생선을 사는데, 정원이 수족관 속에 있는 생선을 빤히 바라보죠. 곧 죽을 운명인 생선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 같아요. 김의환 : 마음에 이미지로 머물게 하는 방식이 설득력 있었어요. 억지스럽지 않고. 정말 저랬겠다, 싶고. 윤성용 : 다른 영화였다면 달랐겠죠. 의사가 갑자기 시한부 선고를 한다든지, 가족끼리 부여잡고 운다든지. 김의환 : 신파로 빠졌겠죠. 이 영화는 죽음을 상기하면서도 남은 일상을 계속 살아가고, 정리할 건 정리하고, 사랑도 이어가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을 잘 보여줘서 좋았어요.
우리는 생애 마지막에서 윤성용 : 나도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정원처럼 일상을 그대로 살아낼 수 있을까, 하면 잘 모르겠더라고요. 다른 영화에서는 시한부인 주인공이 여행을 간다거나 돈을 펑펑 쓴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죠. 하지만 정원은 평소처럼 사진관에서 사진 찍으며 일상을 살아가요. 다림이 다가왔을 때도 내치는 게 아니라 마음에 간직하고요. 김의환 : 저도 그런 상황이라면 정원처럼 살고 싶어요. 남겨진 사람들을 생각하며 잘 정리하며 남은 날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래요. 윤성용 : 생이 일주일 남았다면 무얼 하실 것 같으세요? 김의환 :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고 싶어요. 내가 살아오며 기록해온 것들을 쭉 한번 돌아보고 싶고요. 유별나게 어디 가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건 없네요. 윤성용 : 저도 그래요.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제가 쓴 글과 찍은 사진들을 돌아볼 것 같아요. 김의환 : 그게 정원에게는 사진관이겠죠. 이 영화가 웃고 있는 김광석의 영정사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더라고요. 영정사진이 웃고 있으면 좀 묘할 것 같아요. 보통 활짝 웃고 있지 않잖아요. 많은 경우는 자신의 영정사진이 될 줄 모르고 찍고요. 윤성용 : 뜬금없는 질문인데, 영정사진을 어떻게 찍고 싶으세요? 김의환 : 웃으면 좋을 것 같아요. 웃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윤성용 : 저도 활짝 웃는 얼굴로 찍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쓴 글이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문상객들은 말없는 얼굴만 보고 가잖아요. 날 찾아와 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두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봤어요. 김의환 :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요즘 일도 많고, 월요일이 시작되면 다들 바쁘게 사느라 이런 생각 거의 못하면서 사는데요. 이렇게 한번씩 돌아보게 하는 영화는 좋은 것 같아요.
<8월의 크리스마스> 한 줄 평 윤성용 : 마지막으로 한 줄 평을 들어볼까요. 김의환 : 두 줄 평을 준비했어요. '떠나는 마음의 온기를 품은, 그 시절의 햇살.', '돌아온 봄을 만끽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한 선물 같은 영화.' 이 영화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밝고 사랑이 시작되고 생기가 있고 햇살이 많이 내리쬐요. 그 점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해요. 보는 사람의 기분이 좋아지고 따뜻해지는 힘이 있어요. 윤성용 : 저도 한 줄 평을 해보자면요. ‘일상적이고 은유적이고 절제된 멜로 영화.’ 저는 앞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두려움이든, 사랑이든 그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누구나 다르잖아요. 저는 이 영화처럼 은유적이고 절제된 방식으로 말하고 싶다고 느꼈어요. 김의환 : 문득 놀랐던 게, 1998년도 영화가 어느덧 클래식이 되었더라구요. 그렇게 오래된 영화라고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윤성용 : 20대 분들은 이 영화를 처음 알게 되셨을 수도 있겠네요. 김의환 : 한 번쯤 보셨으면 좋겠어요. 봄도 왔는데 많이들 사랑하셨으면 좋겠구요. 윤성용 : 원래라면 한창 사랑을 시작할 때인데요. 이 영화를 보면서라도 부족한 마음을 채우시길 바랍니다."오늘 xyzorba film은 어땠어요?" 보내주는 피드배은 늘 꼼꼼히 읽고 있어요. 긴 글 끝까지 읽어줘서 고마워요, 친구.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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