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간 제주에서 아침을 맞았다. 창밖에는 매번 봉긋하게 솟아있는 오름이 짙은 푸른색으로 나를 반겼다. 안개인지 비인지 모를 습한 기운이 바닥을 느린 속도로 축축하게 적셨다. 나무들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과 고요가 이곳에 있었다. 좋은 날씨였다.
제주에서는 어디를 가든 오름이 보였다. 오름은 산봉우리의 제주 방언이다. 설문대 할망이라는 여신이 한라산을 만들기 위해 흙을 옮기다가 떨어져서 생겼다는 설화가 있다. 그 이야기를 알고 나서는 멀리 서 있는 오름이 거대한 수호신처럼 느껴졌다. 어떤 신비로운 존재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안정적이고 경건한 마음을 갖게 했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돌탑이었다. 길 곳곳에 구멍이 뚫린 현무암이 불규칙적으로 쌓여있었다. 돌의 수만큼 각자의 염원이 단단히 올려져 있었다. 나도 돌 하나를 얹어볼까 하고 주변 바닥을 살펴보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생각해보니 더 바라는 것이 없었다. 소망이란 간절하고 생동하는 힘이 되지만, 반면에 소망이 없는 삶 또한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가에 대해 생각해봤다. 혹은 그저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아무래도 후자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가파도다. 가파도는 제주도 본섬과 마라도 사이에 있는 섬이다.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를 둘러보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을 만큼 작은 섬마을이었다. 가파도의 깨끗한 바닷바람은 세상살이에 지친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생경한 모양의 나무와 꽃을 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이곳에서 살아간다면, 다소 심심하기는 할지언정 몸과 마음은 누구보다도 건강해질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심심하고 건강한 삶인가, 어지럽지만 극적인 삶인가. 나는 여행할 때마다 그런 고민들을 자주 떠올렸다.
그 고민은 금방 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을 따라 제주를 떠나는 날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아직 바닷물이 남아있는 신발로 길가에 발자국을 남겼다. 잠시 머무른 나를 기억해 달라는 듯 지긋이 눌렀다. |